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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花樣年華)

 

노을

 

시리도록 차갑고 한 편으로는 외롭기도 한 겨울이 끝나고 따뜻한 봄이 오길 기다리는 사람은 많다. 그저 추운 겨울이 지나가길 바라며 봄날의 따스함을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혹은 봄이라는 사계절의 시작과 함께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단순한 계절적 의미에서의 봄이 아닌, 그들과 함께 발을 맞춰 걸어가며 서로의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줄 이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사람들은 봄을 기다린다. 따뜻한 봄의 찬란함을 소망하고 그리워하다 마침내 봄이 왔을 때야 비로소 그들의 인생이라는 이야기 또한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낼 것이다.

 

*

 

책상 앞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김독자가 기지개를 켰다. 3월은 항상 피곤하다. 변화를 싫어하는 김독자는 3월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분명 봄이 온다 싶었는데 꽃샘추위라고,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이렇게나 차가웠다. 이러다 눈도 오겠네. 꽃나무에 새 이파리가 자라나고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하는 계절의 변화 한 가운데에서 김독자는 설움에 겨운 원망을 내뱉었다.

 

"나는 왜 오늘도 학교에서 공부나 하고 앉아 있어야 하는 걸까.”

 

김독자는 책상에 머리를 박으며 생각했다.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고 했나. 김독자에게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봄은 반갑기만 한 계절은 아니었다. 낯선 친구들 사이에서 새로운 학년, 새로운 학기를 시작하고 시험을 준비하는 계절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괜히 꽃이 피면 마음이 들뜨고 마음이 분홍빛으로 물드는 계절이 봄이기도 했다. 하지만 김독자는 그런 봄날의 따뜻함이 싫었다. 모두가 웃고 떠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혼자만 붕 떠있는 게 그리도 싫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 또한 한시의 감정일 뿐, 지금 김독자에게는 제 앞에 있는 수학 문제집이 더 중요했다. 얼른 잡고 있던 문제까지만 풀어야겠다고 생각한 김독자가 눈을 수학 문제에 고정하려 했을 때였다.

 

“김독자.”

 

누군가가 김독자를 불렀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목소리, 유중혁이었다. 김독자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 유중혁.

 

“응, 중혁아. 왜?”

 

김독자는 제 뒤에 있을 유중혁을 생각하고는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띄우고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 퍽 소리 나게 김독자의 뒤통수를 때렸다. 이건 보나 마나 한수영이 분명했다.

 

“아, 왜 때려?”

 

“너는 이 좋은 날에 공부나 하면서 학교에 앉아 있고 싶냐?”

 

김독자에게 있어 한수영과 유중혁은 가끔은 엄마 같기도 하고 가끔은 동생 같기도 한 친구들이었다. 제가 힘들어할 때 위로를 해주기보다는 행동으로 먼저 옮기곤 하는 조금은 제멋대로인 친구들이었지만 그들을 보고 있으면 김독자는 늘 힘이 났다. 말투는 딱딱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다정함은 또 한없이 따뜻한 유중혁과 매일 틱틱대면서도 김독자를 챙겨주고 항상 김독자의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해주는 한수영, 김독자에게 누구보다 소중한 이들이었다.

 

“지금 야자 째자는 거지?"

 

“맞아, 가자.”

 

한수영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김독자는 한숨을 쉬더니 결국에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풀고 있던 문제집을 덮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갈 거면 쌤 들어오시기 전에 얼른 가자.”

 

*

 

“그래서,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건데?”

 

“나만 믿으라니까. 이 한수영 님만 따라와.”

 

“중혁아, 우리 지금 어디 가고 있는지 알아?”

 

유중혁은 그들이 어디를 가고 있는지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그들의 목적지를 김독자에게 말해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한수영은 김독자와 유중혁을 뒤로하고 앞장서서 걸어갈 뿐이었고, 학교를 나온 이상 김독자는 그런 한수영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학교 건물 뒤로 배경처럼 펼쳐진 산은 생각보다 가파르고 험했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쌀쌀한 바람이 김독자를 스쳐 지나가며 서늘한 기운을 전했다. 어두운 산속에서 휴대폰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서 얼마나 걸었을까. 정상이 보였다. 한수영과 유중혁은 그 타고난 체력 덕분에 숨 하나 거칠어지지 않았지만, 그들과 달리 평소 체육을 몸서리치게 싫어해온 김독자는 헉헉대며 숨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가쁜 숨을 내쉬었을까, 이제 조금 진정이 된 김독자가 고개를 들고 한수영에게 물었다.

 

“그래서 여기가 어딘데? 아무것도 없잖아?”

 

“아, 조금만 더 기다려봐.”

 

도대체 뭐가 있다는 건지 김독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산 정상을 두르고 있는 아직은 채 피지 못한 꽃봉오리들이 드문드문 보이기는 했지만 희미한 달빛 아래로 간신히 자신들의 존재감을 알리고 있을 뿐이었다. 휴대폰 손전등을 가까이하고 본 이제 막 피어나고 있는 꽃들은 아름답기는 했지만, 그저 그게 전부였다.

 

“유중혁, 지금 몇 시지?”

 

“9시까지 5분도 안 남았다.”

 

“하마터면 늦을 뻔했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통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뭐가 5분도 안 남았다는 건지 궁금했지만 한수영과 유중혁이 말해주지 않는 한 김독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다리는 것이 전부였다.

 

“김독자, 그거 알아? 우리가 만난 지가 벌써 2년이나 된 거,”

 

고등학교 1학년 때 유중혁과 한수영을 만났으니 정말로 2년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둘을 처음 만났던 날이 어제처럼 생생한데 벌써 함께한 시간이 이렇게나 쌓였구나. 김독자는 잠시 이제는 추억이 된 기억 속에 잠겨 과거를 회상해보았다. 우리도 참 변한 게 없네. 생각해보면 2년이라는 시간 속에 유중혁과 한수영은 늘 김독자의 곁에 있었다.

 

“1분 남았다.”

 

“그러니까 도대체 뭐가,”

 

고요하게 까맣던 밤하늘에 일순간 불꽃이 터졌다. 펑 소리를 내며 띄워진 커다란 불꽃이 여러 개의 작은 불꽃으로 나누어지면서 밤하늘을 가득 채워나갔다. 밤하늘을 따스한 색들로 수놓는 불꽃을 보면서 김독자는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축제는 무슨, 어디 작은 동네 공원 한 번도 놀러 가 본 적 없는 김독자의 첫 꽃놀이였다. 몽글몽글한 분홍빛의 벚꽃도 좋았지만 화려하고도 뜨거운 불꽃은 지금까지 그가 봐온 어떤 꽃보다 아름다운 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김독자의 곁엔 한수영과 유중혁이, 세상 누구보다 소중한 그들이 있었기에.

 

“김독자, 울고 있나?”

 

“아직 안 울거든.”

 

“거봐, 감동이지? 이거 시간 맞추려고 나랑 유중혁이 얼마나 고생했는데.”

 

사실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이렇게 좋은 날에 울 수는 없었기에 김독자는 웃었다. 태어나서 지은 웃음 중 가장 맑고 가장 환하게 빛나는 웃음이었다. 김독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는 불꽃들과 함께, 김독자의 겨울은 끝을 맞이했다. 이제 김독자에게도 완전한 봄이 찾아왔다.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뜻하는 아름다운 네 글자였다. 김독자의 화양연화는 이제 시작이었고, 봄이 온 다음에 뒤따라 이어서 찾아올 여름과 가을, 그리고 또다시 돌아올 겨울까지도 오늘의 불꽃과 함께 타오를 것이다. 밤하늘을 장식하는 마지막 불꽃을 바라보며 김독자는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유중혁, 그리고 한수영, 고마워. 사랑하는 나의 봄날이자 나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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