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봄봄봄

w. 혼애

 

 

[김독자. 28살. 살고 있는 월셋집은 또 돈 밀릴 거면 방 빼라고 연락이 왔고요. 회사에서는 실적 못 낼 거라면 나가라고 합니다. 그러면 뭐 실적 올릴 기회라도 줘야 되는데 놀랍게도 회사에서 전부 정리해고를 할 생각인지 떨거지들을 전부 한 팀에 넣어놨더라고요.]

 

"아, 젠장."

 

분명 영화의 도입부였다면 김독자는 자신이 이렇게 소개됐을 거라고 확신했다. 욕이 절로 나오는 조합에 김독자는 실망감을 숨기지 않았다. 같은 팀으로 묶인 얼굴들은, 업계 입사와 동시에 저 녀석들만 피하면 된다는 멤버 전부였다. 소품팀 블랙홀 이현성, 기획팀 흑염룡 한수영, 홍보팀 주당 정희원, 실행팀 미남 유중혁. 

 

소위 말하는 이벤트 회사. 정확히 말하면 고백을 도와주는 회사. 연애부터 프러포즈까지, 당신도 성공할 수 있다. 사랑하는 그 사람을 위한 절대 잊히지 않을 기억을 심어주겠다는 대표의 의지에서 정확히 반만, 그러니까 '절대 잊히지 않을 기억'만 이행하고 있는 멤버들이 이들이다.

 

"일단 인사부터 할까요? 저는 소품팀 이현성입니다.“

 

예의 바른 이현성이 짧은 스포츠머리를 숨긴 국방색 모자를 벗고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호쾌하고 시원하게 생긴 얼굴, 메뉴얼대로 하는 성격. 밖에서 친구로 만났다면 좋았을 성격이지만 아쉽게도 일에는 젬병이었다. 왜냐하면 소품팀씩이나 된 인간이 물건을 정말 잘 잃어버리기 때문.

 

"다들 입 심심하실까 봐 과자 들고 왔는데……. 어… 왜 개수가 모자랄까요."

 

저거 봐라. 누가 아니라고 할까봐 벌써 하나 잃어버렸다.

옆에서 이현성한테 뭐하냐는 표정으로 쳐다본 한수영이 자기소개를 이어서 했다.

 

"기획팀 한수영이다. 이 거지같은 회사 나가면 창업할 거야. 이름은 한수영 코퍼레이션. 올 사람 대환영.“

 

막대 사탕을 물고 있던 한수영이 대놓고 다른 창업 이야기를 꺼낸다. 조만간 퇴사해서 퇴직금 두둑하게 받아낼 거란 얘기까지 꺼내고는 책상 위에 다리를 턱 올려버린다.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워커 롱부츠가 요란하게 흔들린다. 

두 칸 옆에 앉아있던 홍보팀 정희원이 이직하면 회식은 잦냐고 물어본다. 그런 거 없다고 하니 어째 안심하는 표정을 짓는 정희원이다. 저 사람 분명 주당이라고 하지 않았나. 김독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당이라 회식 없으면 안 가려는 건가 했는데, 본인 의지가 아니면 마시고 싶지 않으시단다. 

 

"인사가 늦었네요. 홍보팀 정희원입니다. 끝나고 술 드실 분?"

 

홍보팀이 술 좀 마시는 게 무슨 문제냐 할 수도 있다. 물론 문제는 아니다. 일하지 않을 때라면 말이다. 바텐더로 투잡을 뛰고 있는 정희원은, 겸사겸사 자신이 일하는 사랑스러운 이벤트 회사를 홍보하고자 잔 밑에 명함이나 홍보지를 아래 끼워두곤 했다. 다만 넘겨줄 때는 이미 상대방이 인사불성이 되어있을 때였다. 정희원 덕에 한 때 고리대금업 회사나 장기 매매 회사로 오인을 받았는데, 그럼에도 사장은 적당히 마시게 하고 홍보지를 주라며 다독였다고 했다. 김독자는 채용되는 순간까지 사장 얼굴은 본 적 없지만, 어지간히 대인배구나- 싶었다.

저번에 정희원과 술을 마시러 갔다 왔다던 이현성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정희원은, 나름 말술이라고 자부해왔던 이현성이 대작하고 유일하게 정신을 잃은 상대였다. 이현성도 나름 인생 풍파를 다 겪고 이곳까지 왔으나, 정희원과의 술 마심이 가장 힘들었던 일 베스트 10위에 들어갈 정도로, 정희원과의 술 상대는 버거웠다. 힘든 일이 베스트 10위까지 있을 정도로 많나 싶지만 그건 넘기자.

 

"아무도 없어요? 현성씨?"

"네?"

"끝나고 가실래요?"

"네?"

 

분명 말꼬리는 올라가는데 정희원이 알았다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누가 봐도 거절이잖아. 하지만 구해 줄 생각 없는 김독자는 얌전히 고개를 저었다. 얘기에 관심도 주지 않던 실행팀 유중혁은 귀찮기만 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려하게 생긴 외모를 지닌 인간은 나른한 표정을 지어도 미남이다. 순간 빠져버릴 뻔한 김독자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혼자만 다른 세계에서 온 듯한 깎아 만든 외모라는 평가를 받는 실행팀 다웠다. 어쨌든 유중혁이 왜 문제냐면, 진짜, 너무도 잘생긴 주제에 실행팀을 하고 있단 것이다. 이벤트 해줄 대상이 유중혁에게 반해서 고백하는 경우는 부지기수였다. 고백을 하게 만들기는 커녕 받아오기는 하는, 실행팀 미남 유중혁. 평범하게 모델 같은 거나 할 것이지 왜 굳이 여기까지 기어와서 실행팀까지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실행팀 유중혁이다. 할 말이 끝났으면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지."

 

아니, 나는?!

김독자가 자리를 뜨는 유중혁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하다못해 인사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기라도 하든가. 유중혁이 잡힌 팔을 보고는 얌전히 다시 자리에 앉는다. 

 

"실행팀 김독자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무슨 거창한 얘기라도 말하는 줄 알고 잡나 했더니. 별 거 아니었군."

 

너 나 아세요?

얼굴 본 지 20분, 지나가다 스치듯이 본 거 몇 번 뺀 거 없는 유중혁이 툭 말을 내뱉는다. 참을 인 세 번을 그리는 동안 유중혁은 이미 자리에서 사라졌다. 

유중혁이 문을 닫고 사라지자 한수영이 저 미친놈은 뭐하냐며, 김독자가 할 욕을 대신해준다. 사실 오늘 모인 취지는 인사만 하면 되는 거였으니 가도 상관은 없었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에만. 여기 모인 건 회사 내 오합지졸들이고, 지금부터 머리 맞대고 계획이라도 짜 놔야 생계를 유지할까 말까다. 주춤거리며 회의를 하네마네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정희원이 품에서 비밀문서 꺼내듯이 종이 다발을 내민다. 

정희원이 구해왔다는 의뢰인, 이미 이야기는 들었던 한수영. 그리고 처음 듣는 이현성과 김독자. A4에 한쪽 달랑 적혀있는 신상 명세와 특징을 훑는 동안 한수영이 브리핑을 시작했다.

 

"의뢰자는 28세 남성. 회사 사장이고, 8년째 짝사랑하는 사람과 연애 플래그를 꽂고 싶다고 한다. 고백 하나 스스로 못 하는 놈이랑 연애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착수 비용은 받았으니까!“

 

한수영이 신랄하게 의뢰인을 깐다. 브리핑보다는 그냥 욕하고 싶었던 것 같다. 듣고 있던 유중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벤트 회사에 왜 저런 사람이 채용됐는지는 모르겠다. 일단 김독자는 자신이 의뢰인이라면 한수영한테는 절대 맡기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지금은 봄이지! 꽃길도 많고! 그러니 우리의 모토는 수갑이다!"

 

대체 그것과 그게 무슨 상관인 건지.

 

"벚꽃으로 데코레이션한 수갑을 서로의 손에 채우고 벚꽃길을 걷는 이벤트를 하는 거지. 수갑을 차고 있다면 서로 싫어도 손을 잡게 될 거라고. 봄에 매여보자! 뭐 그런 슬로건 대충 붙이고."

"남자가 부끄러워서 못 잡겠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그냥 둘이 수갑 끼고 다니는 거지."

"여자가 싫다고 하면요?"

"풀어주고 이런 놈이랑은 사귀지 않는 게 낫다고 말한다.“

 

놀라운 기획력에 이현성이 박수를 쳤다. 정희원도 박수를 친다. 듣고 있던 김독자만 얼이 빠졌다. 누가봐도 미친 계획인데 뭘 박수를 치고 앉아있냐. 일반 성인의 사고로 따라갈 수 없는 기획력때문에 중2병의 상징 '흑염룡'을 얻은 자 다웠다. 한 명쯤은 태클을 걸어줘야 하는데, 대다수가 동의하는 분위기라 어떻게 할 방법도 없었다. 애당초 김독자는 회사 일에 그렇게 열정적인 사원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사고를 쳐서 사지로 몰린 거라면, 김독자는 일을 안 해서 쫓겨났다. 7시에는 김독자가 보는 멸살법이 올라오기 때문에 밤낮없이 돌아가는 회사 재끼고 수없이 빠졌으니까. 특히 이런 업체 끼고 할 인간들은 대부분 주말, 혹은 주중 6시 이후에 하는데, 김독자는 주중팀 일은 모두 참석을 안 했다. 주말에 특별편 올라오면 주말도 빠졌고. 실적이 안 날 수밖에 없었다.

돈 좀 걸리면 급박하게 굴 줄 알았던 독자도 어느새 팀분위기에 휘말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망한 건 알겠지만 기획팀이 엎으면 일 자체가 날아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현성, 당신은 수갑과 열쇠와 벚꽃만 챙겨오면 된다. 알겠나?"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갑 절대 안 끊어지는 걸로 들고 오겠습니다."

"좋아! 장소 물색과 날짜 결정과 세부 요소 조정은 실행팀이 한다. 다들 해산."

 

뭔가 이상한데.

제대로 된 팀에서 2시간 이상씩 했던 회의를 떠올린 김독자가 참다못해 손을 살짝 들었다. 김독자의 거수에 고개를 휙 돌리며 같이 술을 마시러 갈지 정희원이 물었다. 김독자는 조용히 손을 내렸다.

 

❀❀❀

 

봄에 꽃 피는 곳은 어디든 있다. 사람은 회사에 가두고 건물은 회색 흰색으로 칠해놔도 조경은 예쁘게 칠해놓는 대한민국이니 정말 어딜가도 꽃은 있었다. 유중혁과 김독자는 별 고민없이 의뢰인이 자주간다는 인근 공원을 장소로 정했다. 밤보다는 아침이 아름다운 공원이었다. 길도 잘 포장되어있어서 사고가 날 위험도 딱히 없었다. 길이 넓어 수갑 묶은 연인 둘이 지나가더라도 주변인에게 폐끼치는 것도 아니었다. 맨입으로 하기는 심심해서 공원 주변에 미션지를 숨겨놓는 것까지 계획해놓았다. 당일에는 예쁜 종이로 의뢰인이 직접 쓴 편지를 박아 두기로 하고, 그 전까지는 연습으로 회사에 남은 이면지에 대충 1,2,3이나 적어 주변에 던져놓고 연습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어느덧 이벤트 전날까지 왔다. 그것도 무탈하게.

 

"우리 진짜 이래도 되는건가?"

"뭐가 말이냐."

 

너무 순조롭지 않나. 

마치 태풍이 오기 전 고요함 같아서 불안했다. 회사 내 악동들 다 모아놨는데 이렇게까지 잘 이어질 일이 있나 싶어지는 것이다. 여태까지 있었던 위험이라고는 공원에다가 종이 넣다가 관리인한테 쓰레기 버리지 말라고 혼이 나거나, 기껏 숨긴 종이를 산책나온 강아지들이 물어간 정도밖에 없었다. 정희원이 술 안 마시고 있단 이야기와 이현성이 물건을 안 잃어버렸다는 이야기와 한수영의 계획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서운 것이다. 이러다가 시행 전날 회식하다가 전부 술 말아먹고 꽐라 될 수도 있다든가, 이현성이 당일 날 중요한 실수를 한다든가, 한수영 계획이 마음에 안든다고 의뢰인이 말을 바꾼다든가, 유중혁 얼굴을 보고 의뢰인이 반한다든가, 의뢰인 상대방이 반하는 거 아닐까. 아니면 내일은 휴재를 한다고 했던 tls123이 서프라이즈 연재를 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냥. 잘 풀리잖아. 이렇게 쉬울 일인가 싶을 정도로."

"김독자 네 놈에게는 잘 풀리는게 문제인가 보지?"

"그럴 리가 있냐.“

 

뭔 말을 그렇게 서운하게 하냐고 너스레를 떤 김독자는 이현성이 제작한 벚꽃 테이프를 칭칭 두른 수갑을 찼다. 자신의 왼손과 유중혁의 오른손에 매인 수갑이 어째 섬짓할 정도로 차갑다. 보통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장난감 수갑을 찰 텐데, 무게랑 그런게 어째 좀 진짜같다. 이현성이 이걸 어디서 사왔는지 끝까지 입을 다무는게 새삼 불안해진 김독자가 유중혁에게 열쇠는 가지고 있냐고 물었다.

 

"열쇠라면 이현성 줬다."

"왜?!"

"이벤트 때 보물찾기보다 열쇠 찾기하는 게 더 나을 거라길래. 오늘 한 번 해보기로 했다."

"현성씨가 그럼 예비열쇠랑 본 열쇠 다 가지고 있는 거네?"

"그래."

"나 오늘 너만 믿고 예비열쇠는 회사에 두고 왔는데 현성씨가 잃어버리면…."

"만일의 사태가 일어나면 부수면 된다.“

 

믿는다는 말에 유중혁의 얼굴에 살짝 환희가 돌았다. 유중혁 표정이 변하건 말건 김독자는 소품비는 누가 물 건지 걱정뿐이었다. 돈 많아 보이게 생겼다 했더니 진짜로 많았나. 부업으로 화보 모델만 뛰어도 돈 쑥쑥 잘 벌리게 생긴 얼굴이긴 했다. 자기 잘못 아니라며 빈 손바닥을 보여주려고 했던 김독자의 손을 따라 수갑에 매인 유중혁의 손이 딸려 올라온다. 

멀리서 세팅을 마치고 온 이현성이 밝은 모습으로 달려왔다. 오늘은 본격적인 연습을 위해 열쇠도 숨겼고 보물 숨겨놓은 약도도 안 보여줄 거라는 이현성이 슬쩍 김독자와 유중혁의 눈을 피한다. 말이 되나, 약도를 왜 안 보여줘. 김독자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이현성의 옆구리를 아프지 않게 쿡 찔렀다.

 

"현성씨. 약도 잃어버렸죠."

"아닙니다!"

"제 눈 보고 말합시다?"

"…아닙니…다." 

"그럼 지금 제가 너무 화장실이 가고싶어서 그런데 현성씨가 갖고있는 예비열쇠로 좀 풀어줄래요?"

"제가 약도는 잃어버렸어도 열쇠는…! …죄송합니다, 독자씨."

"그렇군요. 중혁아, 끊을 수 있니?"

"그거 특수 제작이라 철물점 가서 끊어야 합니다.“

 

음, 평범하게 망했군.

주머니를 뒤지던 이현성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든다. 그래, 이럴 줄 알았다. 사람이 가장 위험한 순간은 안심하는 때라더니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예비열쇠는 팀 멤버 전체가 가지고 있지만, 정희원과 한수영은 출근을 안 했다. 오늘 출근한 건 유중혁, 김독자, 이현성, 세 명뿐. 한수영은 새 회사 설립으로 등기 떼러 갔고, 정희원은 부업으로 뛰고 있는 바텐더 일을 하러 갔다. 괜히 바쁜 사람 부르거나 찾아가는 것보다 열쇠 찾는 게 더 빠르다. 보물찾기 예상루트는 길어도 1시간 코스. 조용히 철물점 위치도 찾아본 김독자는 20분 거리에 있는 보석방 위치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에 하나 의심받아서 신고당하면 범인은 유중혁과 이현성으로 하자. 마음의 준비를 끝낸 김독자가 유중혁을 이끌었다. 그나마 숨겨놓은 장소들이 당장 어제까지 다녔던 곳들이라 찾는 건 쉽다는 점. 

 

"그래도 하루 전날 이래서 다행이다. 마지막 날에 이렇게 돼서 다행이지."

"그렇군. 마지막인가.“

 

종이 하나, 종이 둘, 종이 셋. 풀숲이나 돌 사이, 음수대 아래. 총 10개를 숨겨놓은 미션지에서 찾은 것 중에 열쇠는 없었다. 미션지 5개는 이현성이 찾아오기로 했으니 남은 건 2개. 빠른 진행을 할 수 있음에도 마지막 소리를 들은 유중혁이 요상하리만치 비협조적으로 굴었다. 가령 꽃을 보라면서 시선을 돌리거나, 날씨가 맑으니 천천히 걷자고 일부러 걸음을 느리게 하거나. 산책 끝나고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강아지 같았다.

 

"김독자. 저기 꽃이 피었다."

"그래그래. 꽃은 여기도 피었고, 저기도 피었고, 우리 발 아래도 피었지."

"...꽃 이름을 알고 싶군."

"그래그래. 파란제비꽃이네. 아까는 보라색제비꽃 찾았지? 흰색도 있다는데 찾아볼까?"

"좋다.“

 

좋긴 뭐가 좋아. 

네번째 미션지를 찾으러 가는 여정에서 유중혁의 발걸음은 거의 기어가는 수준으로 느려졌다. 세 걸음에 한 번씩 김독자를 멈춰 세우고는 말을 거는 유중혁 때문에 김독자는 식물 도감까지 다운받았다. 공원에 있는 들꽃 이름 다 알아가는 게 목적인지, 아니면 혹시 대학 전공을 식물학으로 한 건지 묻고 싶었던 김독자는 끓어오르는 속을 가라앉혔다. 괜히 자리에 앉아서 파란색 제비꽃이군…. 하고 중얼거리는 유중혁을 보면 절로 화가 삭혀졌다. 그 이후에는 화로 인해 뛰는 거센 심장 박동만 남아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효과만 남았다.

봄이란 건 참으로 이상한 것이어서, 괜히 가만히 있는 사람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한껏 물렁한 마음이 된 김독자는 느리게 움직이는 유중혁의 행동이 밉살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짧은 수갑의 길이 때문에 살짝 닿는, 뼈마디가 굵은 손가락. 수풀을 뒤지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털려고 무심코 오른손을 들었다가 딸려오는 김독자 손을 보고 황급히 내리는 어색한 손짓. 무엇보다 쓸데없이 빛이 나는 얼굴. 당황으로 살짝 붉게 달아오른 유중혁의 손끝이 김독자의 손가락 끝을 간질였다. 손가락만 쫙 펴도 닿는 거리. 간지러운 곳이 비단 손가락 끝만은 아닌 것 같아 김독자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미쳤구나. 김독자, 여기서 얼굴이 왜 붉어져. 김독자는 스스로에게 욕을 했다.

 

"김독자."

"어, 어. 2개 남았다. 다음 종이에는 열쇠 있으면 좋겠다. 그렇지?"

"그래. ...움직이기 불편하면 손 잡아도 상관 없다. ...빨리 찾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럴까?“

 

분명 아쉬워하는 기색인 것 같은데 김독자는 저 잘난 인간이 그럴 리 없다고 자신을 설득했다. 그리고 꿈 깨라며 자신의 한쪽 볼을 늘렸다가 놓았다. 아주 봄이라고 신났구나. 건드리면 안 될 것에도 눈독을 들이고 말이야, 김독자. 

새끼손가락만 살짝 걸쳐 잡은 김독자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보폭이 큰 유중혁보다 더 빨리 걷기 위해 잰걸음을 걷는 김독자의 고개는 갈수록 숙여졌다. 어떻게든 붙들고 있던 이성은 유중혁이 새끼 손가락은 감질난다는 듯 손깍지를 껴 잡았을 때 전부 날아갔다. 열쇠가 문제가 아니라 이제 유중혁이 김독자 자신을 좋아하는 것 아니냐는 가설에 대해 증거를 찾아야 할 것 같았다. 

김독자는 실험 차 유중혁의 손을 일부러 쥐지 않고 살짝 펼쳤다. 유중혁의 손가락이 김독자의 손등 위에서 머뭇거리다가 다시 한 번 손을 꼭 쥔다. 김독자가 같이 깍지를 끼고 나서야 힘이 풀린 유중혁의 손가락을 느끼며 김독자는 심장 어디 한 쪽이 고장 난 기분이 들었다. 

 

'유중혁 얘가??? 나를??? 왜???'

 

한수영 이벤트 효과를 찬양을 해야하는 걸까. 유중혁은 이제 김독자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김독자는 머리를 굴려 유중혁이 자신에게 반할 이유를 헤아렸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첫만남은 거지같았고, 같이 시뮬레이션 돌려보는 동안 드라마틱하게 반할 꺼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전에 만난 적이 있었는가 하면, 없었다. 

김독자가 골몰히 고민하며 4번째 종이를 찾았을 때, 이현성 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약도랑 예비열쇠를 흘린 곳을 찾아 이제 돌아갈 수 있다며. 연락을 받은 김독자가 유중혁에게 돌아갈 것을 제의하며 발을 돌렸는데, 유중혁이 망부석마냥 안 움직였다. 우뚝 선 유중혁을 잡아 이끌던 김독자가 뻣뻣하게 뒤로 백스텝을 했다. 김독자의 체력으로 유중혁을 데리고 가는 건 무리였다.

 

"혹시 돌아가기 싫어? 있다가 약도 찾고 돌아와도 되니까..."

"같이, 더 있고 싶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만개한 벚꽃이 유중혁과 김독자의 위로 하늘하늘 떨어졌다. 김독자의 하얀 가디건 소매 끝을 쥔 유중혁이 말을 꺼냈다. 왜 저 인간은 말을 해도 배경이 도와주냐고 따지고 싶을 지경이었다. 제 3자의 입장이었다면 그렇게 욕을 실컷 퍼부었겠지만 물음의 대상은 김독자 본인이었다. 살면서 처음 받아 본 고백에 김독자는 눈알만 굴리다가 머릿 속에 떠오른대로 대답을 꺼냈다.

 

"내일도 있잖아. 오늘은 집에 가자."

 

유중혁의 눈이 슬퍼진다.

김독자는 죽고 싶어졌다. 스스로의 의지로.

 

❀❀❀

 

"그래서. 거기서 판 다 깔아놨는데 집에 가자고 했다고?"

"그래."

"포기해라. 김독자는 너한테 마음이 없어.“

 

김독자가 수갑을 풀고 튀어버리고, 한수영과 이현성, 유중혁이 정희원이 일하는 칵테일 바로 모였다. 나초나 집어 먹으려 온 한수영은 깔깔 웃으며 나초가 아니라 팝콘을 시켰어야 했다고, 유중혁을 놀렸다. 이야기를 들은 정희원도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쉐이커에 얼음과 술 이것저것을 넣고 섞어 유중혁에게 건넸다. 잔에 들어있는 알콜의 색이 검은색에 가까웠다. 정희원이 마지막에 앞뒤 안 재고 안에 색소 리큐르들을 들이붓길래 뭔가 무지개라도 나올 줄 알았던 유중혁이었다.

 

"이게 뭐냐."

"레시피에는 없고요. 그냥 더럽게 쎈 거 여러 개 섞었어요. 속이 말이 아닐 것 같아서."

"오, 이건 내가 살게.“

 

강 건너 불구경 중인 한수영이 정희원에게 손을 흔들었다. 제대로 보증 안 된 건 마시지도 않던 유중혁도 오늘은 군말 없이 정희원이 주는 것을 받아마셨다. 옆에 있던 이현성이 안 된다며 잠깐 말리다가 입을 닫았다. 정희원이 이현성의 앞에 다른 잔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정희원이 주는 걸 거절은 할 수 없었던 이현성은 울상을 지으며 잔을 받아마셨다. 좀 나눠 마셔도 될 텐데 롱 샷을 주든 쇼트 샷을 주든 무조건 한 큐에 들이마시는 이현성이었다. 그 점이 정희원을 더 불타오르게 만드는 것도 모르고. 

정희원이 쉴 새 없이 쉐이커를 흔드는 동안 유중혁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혹시, 김독자가 내 얼굴이 마음에 안 드는 거면."

"풉."

 

옆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이현성이 술을 뱉었다. 정희원이 이현성 등을 두드리고 한수영은 이현성 두들겨주는 척 때렸다. 세상 혼자 살아도 될 얼굴을 한 놈이, 고백에 대한 대답 한 번 못 들었다고 하는 소리가 저따위인 게 너무도 웃겼다. 김독자가 유중혁의 이 꼴을 봤어야 한다고 한수영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바 테이블에 누워 흐느꼈다. 

 

"야. 언제는 김독자가 너 얼굴 보고도 반응 안 해서 좋다며. 이제 와서 얼굴 안 먹히니까 아쉽냐?“

 

유중혁이 김독자를 반하게 된 경위를 전부 알고 있는 한수영이 삼각형 나초를 아작아작 씹었다. 

 

"그래."

 

짝사랑 외길 8년. 신입생 환영회 때 같은 대학 경영학과를 간 유중혁과 김독자의 첫 만남. 성적 맞춰서 온 김독자와 수능 말아먹고 일단 대학이라도 들어는 가겠다고 온 유중혁. 주변 인간을 모두 오징어로 만들어버리는 유중혁의 외모에 모든 관심은 단 한 사람에게로 쏠렸다. 질투, 동경, 어떻게든 수작을 걸어보려는 누군가와 유중혁이 이만한 외모를 가졌으니 주변인도 괜찮을 거라며 떡고물을 노리고 접근하는 인간들. 단시간에 파악 가능한 인간 군상에 유중혁은 신물이 난 표정으로 자리만 지켰다. 

그리고 이어지는 FM과 자기소개, 끊임없이 권해지는 벌주와 축하주. 쇄도하는 흑기사 요청. 모든 흑기사를 다 받아들인 유중혁은 자신에게 말을 안 걸었으면 좋겠다고 요청을 한 인간들을 다 쳐냈다. 얼굴을 빚느라 싸가지는 챙기지 못했다는 평가가 내려진 유중혁에 말을 거는 사람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원래 유중혁도 이렇게까지 모난 성격은 아니었으나, 수험생 때 매일같이 학원과 독서실에 전해진 간식거리 때문에 물을 흐린다며 제적당한 뒤로는 성질을 부리게 되었다. 오죽하면 자신의 이상형을 자신의 얼굴 보고 반응하지 않는 사람으로 바꿀 정도로. 

대학교에 오면 다양한 인간들이 있다길래 조금 기대했는데 선배도, 동기도 다 거기서 거기인 듯했다. 더 이상 실망하기 싫었던 유중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슬그머니 구석에서 핸드폰만 보고 있던 희멀건 남자가 같이 일어났다.  한 번씩 자신을 흘끔흘끔 훑을 때, 유일하게 자신을 보지 않던 남자. 붉어진 얼굴을 보니 술을 꽤 마신 듯했다.

이름이 김독자였나. 스쳐 지나가듯이 말한 이름이 특이해 뇌리에 박혔던 유중혁이 그를 불렀다. 집에 가야 한다며 주변을 뿌리치던 김독자가 유중혁을 보고 ‘저 놈은 뭔데 날 부르냐’ 표정을 짓다가, 집에 가려면 저 녀석을 이용하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리고 빠르게 표정을 바꿨다.

 

"중혁아!"

"이렇게 될 때까지 마시지 말라고 했지 않았나."

"하하. 너무 즐거워서 그만. 근데 조금 속이… 우웁…!"

 

김독자가 헛구역질을 하자 주변에 모세의 기적이 펼쳐졌다. 잘 데려가겠다고 인사를 하고 나온 유중혁과 김독자는 사이좋은 어깨동무를 빼고 정색을 했다. 

 

"말 맞춰서 고맙다? 집에 가야 했는데 덕분에 쉬웠어. 진짜 토할 준비까지 했거든.“

 

이미 6시라 지금 집으로 출발해야 도착해서 씻고 경건한 마음으로 멸살법을 읽을 수 있다. 김독자가 가볍게 감사를 표했다. 억지로 술까지 마시며 준비를 마쳤던 김독자가 핸드폰을 켜고 얼굴을 확인했다. 눈은 조금 충혈됐지만 이 정도 몸 상태면 집에 가서 무사히 정시에 연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잘-까진 아니더라도 나름 괜찮게 생긴 웃는 얼굴을 구경하던 김독자의 카메라 밝기가 갑자기 확 내려간다.

[배터리가 부족합니다.]

간당간당한 배터리를 보자마자 마음이 조급해진 김독자가 핸드폰과 유중혁 얼굴을 번갈아봤다. 무슨 할 말 없으면 가겠다고 하자 유중혁이 김독자를 불렀다. 처음으로 유중혁의 얼굴을 제대로 본 김독자는 2초 정도, 멸살법 중혁이가 이렇게 생겼을까 싶어 현실과 이상을 분리해버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김독자가 자신의 얼굴을 보고도 아무 반응을 안했다는 사실에 신이 나서 혼자 김독자에게 빠져버린 것이다.

 

"혹시 이상형이 있나?"

 

뭐야, 이 미친놈은.

혹시 자신한테 관심 없는 놈만 공략하는 악취미인가 싶어 경계심을 숨기지 않은 김독자가 유중혁을 위아래로 훑었다. 술기운 때문에 시야에 블러 효과가 들어가긴 했지만 정말 잘 생긴 얼굴이었다. 그래도 멸살법이 우선이었던 김독자는 이 잘생긴 악취미의 미친놈을 쫓아내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었다.

 

"최소 그 인간 죽을 때까지 망하지 않을 자기 사업체 가지고 있는,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인간. 그리고 나한테 그 사업체 넘겨주고, 일은 안 내보낼 헌신적인 인간. 삼시세끼 중 최소 두끼 한우로 밥 차려주고, 자기는 일 나가도 나는 집에 있어도 된다고 할 수 있는 인간."

"알아두겠다.“

 

알아두긴 뭘 알아둬.

김독자는 이 미친놈을 다시는 보기 싫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유중혁은 그 다음날 자퇴서를 내고 재수를 하러 갔다. 학교에서 창업을 장려한다는 국내 최고 대학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너네가 들어도 미친놈 같지? 나랑 이놈이랑 만나게 된 것도 이 자식이 재수할 때 김독자 못 잊겠다고 고민글 올린 거에 내가 답장해서라니까? 그 때 글 제목 아직도 기억 난다. '내 얼굴에 반하지 않는 그 사람이 너무 좋습니다.' 크으...! 이게 웬 어그로 글인가-하고 들어갔는데 내용이 진지한거야. 요즘 드라마도 '나에게 이렇게 대한 건 처음이야' 쓰면 욕 먹는데 그걸 그대로 하는 인간이 있대. 얼마나 재밌어. 그래서 아침 드라마 보는 기분으로 조언해줬지. 나 유중혁 얘 덕분에 문창과로 전과했잖아.“

"닥쳐라, 한수영."

 

유중혁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얗게 질린다. 턱에 핏대가 섰다가 사라진다. 한수영은 그마저도 웃겨서 넉다운 된 이현성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아, 배 아파."

"조언이나 마저 해줘라."

"하긴 뭘 해. 내일 제대로 고백해. 김독자 너랑 한 번 사귀어보겠다고 내가 8년 동안 창업도 하고! 회사도 키웠다!"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김독자 걔가 너한테 말한 조건들, 진심도 아니었을 걸? 그 자식 맨날 핸드폰 붙잡고 살아서 주변에 관심이 없다고. 장담컨대 그 신입생 환영회 때 네 얼굴도 제대로 안 봤어. 이현성이 원래 홍보팀이었던 것도, 정희원이 원래 소품팀이었던 것도 모르잖아." 

 

김독자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업체의 사장은 유중혁이었다. 어차피 나중에 김독자한테 넘길 사업이라 일부러 사장이라고 소개하고 다니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현성은 신중하고 올곧은 이미지로 홍보팀 및 백업팀으로 넣어놨었고, 정희원은 꼼꼼하고 날카로운 센스가 필요한 소품팀에 넣어놨었다. 유중혁이 망한 듯이 보이게 만들어놓은 판은 사실 최정예로 이루어진 팀이라는 뜻이다. 김독자에게 할 단 한 번의 고백을 위해서.

 

"걘 주변에 관심은 없는데 밖에 나동그라져 있기는 싫으니까 소문은 주워듣는 인간이라고. 그런 인간이 자신한테는 솔직해본 적이 있을 것 같냐. 가서 '그런 김독자 너도 사랑한다.' 해주면 끝."

"하지만 오늘-"

"야, 유중혁. 본방은 내일이야. 오늘은 시-뮬-레-이-션. 알겠냐? 하소연 다 했으면 가서 자라.“

 

❀❀❀

 

술 마시고 잠만 잘잔 유중혁과 달리 오히려 죽을 상이 되어 온 건 김독자였다. 자기 좋다는 사람보는 건 처음이라서, 고백을 받아야 할 지, 밀어낼 지를 고민을 끝낸 시간이 오전 12시였고, 그에 대한 답을 정하고 나니 3시였다. 새벽에 잠을 안 자면 속이 미식거린다는 것을 처음 안 김독자는 괜히 화장실도 갔다가, 따뜻한 물도 마셔보다가 결국 못 자고 해뜨는 것까지 다 봤다. 3시간이라는 이례적인 수면시간을 기록한 김독자의 문제는 이제 유중혁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침대로 가고 싶어. 오로지 그 열망만이 남았다.

 

"중혁아, 오늘 잘해야 할 거야, 네가."

"그래."

 

이벤트 장소에서도 잠이 안 깬 김독자의 말에 유중혁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유중혁은 말만 잘하면 김독자가 고백을 받아주겠단 뜻으로 받아들였다. 김독자는 자기 오늘 일 못하겠으니 유중혁 네가 다 해야 한다는 의미였지만.

약속된 시간은 3시. 해가 조금 내려간 시간대. 하지만 훨씬 전에 이벤트 준비를 마쳐야하는 유중혁과 김독자는  일찍이 나와 열심히 미션지를 숨기고 다녔다. 단 한 사람만을 위해 숨기는 보물은 잠결에도 어쩐지 특별해서, 전보다 더 열정적으로 숨겼다. 

 

"김독자."

"어."

"시간이 다가오는군.“

 

왜 네가 떨리는 표정을 짓냐. 아, 너 나 좋아하지.

자리에 돌아온 유중혁이 복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태클을 걸 힘이 없어 김독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벤트 설명을 위해 수갑을 미리 찬 유중혁과 김독자가 가짜꽃이 매달린 머리띠를 쓰고 대기를 했다. 이벤트라는 걸 알리기 위해 맞춰 입은 새하얀 긴팔 티도 커플티처럼 보였다. 2시, 그리고 3시. 정각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는 망할 의뢰인들때문에 김독자의 표정이 관리가 되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더 기다려야 하나 했던 김독자가 갈까, 라고 중얼거리자 유중혁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난 뭘 위해 그렇게 열심히 미션지를 숨겼나. 

허탈하게 주머니에서 예비열쇠를 꺼내려 했더니 유중혁이 김독자의 손을 제지한다.

 

"뭐하나. 미션지 찾으러 가야한다."

"우리가? 왜?"

"의뢰인이 나니까.“

 

그런 건 조금 더 빨리 밝히라고.

김독자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았다. 뭘 위해서 열심히 미션지를 숨겼는지에 대한 2차 후회가 밀려왔다. 어제처럼 손깍지를 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머뭇거리는 게 더 심해졌다. 수갑 아래에서 살랑거리는 손끝이 여전히 뜨거워서 김독자는 그냥 자기가 손을 잡았다. 유중혁이 놀라서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김독자는 미션지랑 열쇠 찾고 어서 집에 가서 자고 싶었다. 

손을 잡고 빨리 다니는 김독자의 발걸음에 유중혁이 신나서 뒤를 뽈뽈 쫓아다녔다. 일단 자신이 숨긴 미션지 위치들은 다 찾은 김독자가 주머니에 종이를 쑤셔넣었다. 어쩐지 자신이 맡은 것들 중에 열쇠랑 무슨 편지 같은 것만 있다 했더니만, 다 낚시용이었다. 그렇다면 진짜는 이현성과 유중혁이 숨긴 것들 사이에 있다는 건데. 들뜬 유중혁이 도무지 순순히 알려 줄 것 같지가 않았다.

 

"중혁아."

"뭐냐."

"약도 내놔."

 

네가 안 알려주면 내가 찾겠다. 거절하면 이현성에게서 뜯어낼 각오였던 김독자의 의지가 무색하게 유중혁이 순순히 약도를 넘겼다. 어제 숨겼던 장소와 비슷비슷하게 숨겨서 이래저래 찾기 쉬워진 김독자는 순식간에 미션지들을 찾아냈다. 

열쇠가 있는지만 확인하던 김독자가 미션지 내용이 이상하다고 느낀 건, 8번째 미션지를 찾았을 때였다. 이벤트 업체 등기 이전 서류. 분명히 7번째로 찾은 내용이 이벤트 업체 회사 자산 규모였다. 뭔가 떠오를 듯 말듯한 과거의 기억에 김독자가 앞서 찾았던 미션지들을 펼쳤다. 한우 갈비 교환권, 한우 생고기 교환권, 한우구이 전문점 식사 이용권. 유중혁 이용권.

 

"유중혁 이용권?"

"그거 사용하면 너 대신 내가 일 나가서 돈 벌어 올 거다.“

 

떠오를 듯 말듯한 기억에 김독자가 유중혁을 끌고 다음 미션지가 있는 장소로 향했다. 하지만 9번째 쪽지는 찾지 못했고, 10번째 쪽지만 찾았다. 벚꽃 나무에 묶어놓은 미션지. 쪽지를 펼친 김독자가 헉 소리를 뱉었다. 1000만원짜리 수표.

 

"최소 2달에 한 번은 그걸 만지게 해주겠다."

"최소?"

"최소. 관련 업체들 인수하면 더 잦아지겠지."

"조건은?"

"...연애하자, 김독자. 말했던 조건은 다 하지 않았나. 업체도 있고, 너한테 넘겨 줄 의향도 있으며, 너는 일 안 나가도 되고, 밥은 두 끼 이상 한우로 먹여주겠다.“

 

불현듯 떠오른 8년 전의 기억에 김독자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검지손가락을 유중혁에게 가리켰다. 신입생 환영회의 피로감과 오늘 잠을 자지 못해 오는 피로감의 정도가 비슷해 그 기억이 더 생생하게 떠올랐다.

 

"너, 그때. 신환회."

"그래."

"중혁이 너 근데 그 뒤로 학교 안 왔잖아."

"재수하고 다른 대학 갔다. 창업 밀어주는 학교로.“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니야.

8년 전에도 느꼈지만, 그동안 업그레이드 된 그의 미친 행동력에 김독자의 머리가 어디 하나 얻어맞은 것처럼 띵해졌다. 

 

"대답은?“

 

이걸 어떻게 거절해. 준비해놓은 대답은 이미 필요가 없었다.

김독자가 수갑이 묶인 손을 들었다.

 

"이거 놓고 제대로 고백해, 빌어먹을 새끼야.“

 

유중혁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웃는 낯짝을 보니 대답하기 전까지는 열쇠를 안 풀어줄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얼굴은 잘생겼으니 배신감 따위는 싹 가셨다. 

벚꽃 모양 수갑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유중혁과 김독자의 손 사이에 흩날리던 벚꽃 하나가 앉았다. 드디어, 봄이었다.

©2019 by flower_viewing_JDS. Proudly created with Wix.com

©Copyright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