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 be continue...?
멸망한 세계에도 꽃은 피웠다. 무너진 건물, 갈라진 도로에서 싹을 틔우고 생명을 키워냈다. 어떤 건물에는 타고 올라간 담장이가 건물을 뒤덮고 있었다. 회색으로 물든 도시에 듬성듬성 보이던 초록빛이, 이제는 역전되어 초록빛 속에 듬성듬성 회색이 보였다. 그 어떤 곳보다 회색으로 물들었던 공단은 이젠 푸른 하늘과 자연이 어우러지게 되었다.
옥상에서 바라본 공단에 깃든 창천의 모습은 언젠가 보았던 세계의 모습과 닮아있어서, 줄곧 잊고 있었던 기억의 파편에 바닥에 등을 기대었다. 몸에 힘을 빼고 눈을 감으니, 지나가는 바람이 제 몸을 감싸 달래주었다. 당시에는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이제는 평범한 휴식이 되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누군가가 진정으로 아껴준다면, 그리고 당신이 그 애정을 온전히 받는다면 그 어떤 나쁜 기억들도 그 애정에 덧칠해지게 될 것이라고. 아픈 기억이 완벽하게 사라지진 않겠지만, 그보다 더 행복해질 기억에 아픔보단 다가올 행복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예전에는 그저 듣기 좋은 말이라고 외면했던 것들이 이제는 하나둘 제 안에 새겨지게 되었다. 나쁜 것들은 흘려보내고 좋은 것들로 채우자. 그래, 그것이 그가 이번 삶을 살아가기 위해 다짐한 작은 결심이었다.
어느 날, 아이들이 말했다. 공단에도 식물을 심어보는 것은 어떠냐고. 그 말에 다른 일행들도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왕 심는 거면 다양하게 심어보는 것이 어떠냐고. 그렇게 공단 옥상에 도깨비 보따리에서 산 재료들을 늘어놓고 커다란 공원을 만들었다. 방수되도록 처리하고 수로도 따로 빼놓았다. 그다음 흙과 비료를 섞어 다닐 길을 제외하고 가득 뿌렸다. 성인 다섯이서 각자 구역을 정해 누가 먼저 다 뿌리나 내기 따위를 하며. 중간 중간 장난을 치는 바람에 구경하던 이도, 내기하던 이들도 모두 빠짐없이 흙으로 범벅되었다. 서로의 모습이 우스워 옥상을 내려가, 씻으러 각자 방으로 가는 순간까지 건물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다음날, 모두 같이 늦은 아침을 먹고 옥상으로 올라가 미리 준비해둔 묘목과 씨앗을 꺼냈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따라 어른들이 준비한 설계도를 펼쳤다. 설계를 하면서 의외였던 것은 유중혁이었다. 관심이 없을 것 같았지만 혹시 하고 부른 것이 답이었다. 직접 채소를 재배해 본적이 있어 그의 조언은 도움이 되었다.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유상아의 도움이 매우 컸는데, 워낙 다양하게 지식을 쌓았기 때문에 심는 위치나 방법등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설명에 따라 각 구역을 나눠 다채롭게 꾸미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일명 산책로엔 벚꽃과 꽃을 심고 정좌를 설치하여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하였다. 그 옆에는 허브와 식용이 가능한 채소와 과일을 심는 곳, 가을에 따먹으면 맛있을 것 같다며 밤나무와 감나무, 남은 한쪽에는 날씨와 상관없이 키울 식재료를 위한 비닐하우스까지. 다 심을 순 있는지 걱정이 될 정도였지만, 시나리오의 압박에서 벗어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무를 순 없었다. 이현성과 정희원이 정좌를 만들고, 이설화와 한수영이 묘목을 심었다. 이지혜와 아이들은 키득 장난을 치면서 씨앗을 뿌렸다. 유중혁과 내가 비닐하우스를 만들었고, 이 모든 지휘는 유상아가 맡았다.
다른 사람들과 동떨어진 곳에서 유중혁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따라오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자재를 한 곳에 쌓았다. 적당히 막대 네 개를 꽂아 크기를 가늠하는데, 한숨이 섞인 목소리가 말을 건넸다.
“언제까지 무시할 거지?”
“내가 언제? 중혁아, 크기는 이 정도면 될까?”
여전히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고 작은 종이에 눈을 고정했다. 곧, 철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제가 표시한 자리에 철골이 하나둘 자리 잡았다. 큰 틀을 바탕으로 뼈대가 될 철골들을 들었다. 비닐하우스를 만드는 내내 대화 한마디 없이 묵묵히 일하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자신이었다. 선을 그으려고 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남은 날들을 이런 식으로 보내고 싶진 않았으니까.
“중혁아, 넌 꽃을 좋아해?”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는 듯한 표정이 얼굴에 그려졌다.
“언젠가 흰색 동백꽃을 본 적이 있어. 책에서 표현되는 동백꽃은 붉은색이니까.”
몰랐거든. 삼킨 말을 알아들었는지 작게 끄덕이는 모습에 작게 미소가 그려졌다.
“그날따라 눈이 참 많이 내리던 날이었는데, 새하얀 세상 속에서도 당당히 제 색을 빛내는 모습이 아름답더라.”
“그래서.”
“언젠가 모든 시나리오가 끝나면 너도 그 풍경을 봤으면 좋겠어서.”
웃음기 담긴 말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쓸쓸함에 유중혁은 조용히 하던 작업에 몰두했다. 설마, 자신이 생각하는 것은 아니길 바라며, 그가 그리 생각해도 막으면 되니까.
완벽한 걸 좋아하는 성격인건 알았지만, 누가 봐도 튼튼하다라는 생각이 드는 비닐하우스가 만들어졌다. 유중혁은 비닐하우스 안의 흙을 정리하고 묘종을 심을 밭을 일궜다. 혼자서도 충분하다는 말에 스트레칭을 하며 발을 옮겼다. 저멀리 완성되어가는 정좌와 흙투성이인 아이들, 옥상에 푸르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저 멀리 드러누운 이들을 뒤로하고 유상아에게 다가갔다.
“상아씨 거의 다 완성되었나요?”
“아, 네. 그 쪽은요?”
“하우스는 완성했고, 지금 중혁이가 모종을 심을 밭을 일구고 있어요.”
어깨를 으쓱이자, 쫓겨났냐며 웃는 이지혜를 슬쩍 밀치고 아이들 옆에 앉았다.
“아저씨, 그거 아세요? 희원언니가 그러는데 대천사가 축복해서 내년이면 꽃놀이를 할 수 있대요!”
“그래?”
대천사의 축복이라. 우리엘이 분명했다. 이 작은 묘목이 빠르게 자라나 만개할 모습을 생각하니, 제가 있는 곳이 평범함을 벗어났다는 사실이 다시금 와 닿았다.
“독자형! 그래서 말인데, 내년에는 꽃놀이 꼭 할거죠?”
“그래, 도시락도 만들어서 즐길까?”
벌써 신났는지 두 아이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소식을 전파하고 있었다. 피어나는 웃음꽃 속에 김독자는 눈을 감았다. 흙냄새와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아서.
옥상정원이 완성된 날, 모두 모여 파티를 했다. 아직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꽃놀이 일정을 준비하는 모습에 그저 웃음만 나왔다. 그리도 신이 나는지. 멀리서 모습을 지켜보며 마시던 음료를 비우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꽃놀이를 즐기기 위해서는 누구 하나 잃지 않아야 했다. 방에 도착해 씻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핸드폰 화면 속 텍스트를 몇 번이고 읽으며, 경우의 수와 방법을 나열하며 되뇌었다. 오롯이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이니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옥상의 식물들은 하루가 멀다고 자라났다. 일행들은 시나리오가 없으면 옥상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생사가 오가는 시나리오의 세계에서 즐길 수 있는 작은 휴식공간은 일행의 멘탈 케어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아이들은 유상아의 도움을 받아 달력을 만들어 꽃놀이 날짜까지 정했다. 아이들이 정한 날짜가 가까워졌을 때쯤, 오랜만에 유중혁을 찾아갔다. 비닐하우스에서 채소를 가꾸는 모습이 퍽 어울려서 웃음부터 나왔다.
“중혁아 삼일 뒤에 옥상에서 꽃놀이를 즐기기로 했는데, 참여할거지?”
“고려해보지.”
섬세한 손길로 하나하나 가꾸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너는 이런 모습까지 아름답네.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떠나는 모습을 유중혁은 말없이 지켜봤다. 멀리 사라지는 기척에 눈을 감았다. 김독자는 바보였다. 그것도 아주 미련한.
꽃놀이 당일, 기분을 내겠다고 다같이 주방에 모여 소풍에 먹을 음식을 만들었다. 아이들은 고사리 손으로 주먹밥을 만들었고, 한쪽에서는 김밥과 유부초밥, 과일 등을 통에 차곡차곡 담았다. 물론, 조리는 유중혁이 맡았다. 요리는 늘 그가 해왔으니까. 이상할 것도 없었다. 차곡차곡 쌓이는 도시락을 바구니에 나눠 담고, 어디서 구해 왔는지 커다란 돗자리까지 챙겨 옥상으로 올라갔다. 상쾌한 바람과 따뜻한 햇살, 그리고 흩날리는 꽃잎이 마치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아서. 이현성이 정좌 아래 돗자리를 펼치고 아이들이 벚꽃 아래에서뛰놀았다. 돗자리 위에 도시락이든 바구니를 올려놓고 어떤 이는 눕고 어떤 이는 풍경을 즐겼다. 이 풍경이 낯간지러우면서도 어색해서 멍하니 서 있었다. 뒤에서 툭치고 지나가는 유중혁과 언제 왔는지 아이들이 팔을 이끌었다. 생의 첫 경험은 따뜻하기만 해서 그저 같이 있는 시간만으로도 행복했다. 활짝 웃는 사람들과 분위기를 타서 그런지 그날따라 더 맛있었던 음식들, 한순간 한순간이 보물 같아서 마음속 작은 상자에 보관하였다.
“아저씨! 내년에도 꽃놀이 올 거죠?”
“형! 내년에도 꼭 할거죠?”
“그래, 매년 이렇게 모여서 즐기자.”
행복에 젖어서 다가올 이별을 잠시 잊었다. 손에 쥔 행복을 최대한 만끽해야 했으므로.
종종 벚나무 아래에서 잠들었다. 잠에서 깨면 담요가 제 몸을 감싸고 있었다. 담요에서는 늘 제가 좋아하는 시원한 향이 났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제가 늘 이렇게 잠들면 뒤늦게 담요를 가져와 덮어주고 곁에 머물다 간다는 것을. 김독자는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한 고백이 무슨 의미였는지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잊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넘어갔다. 처음에는 화를 내고 답을 요구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유중혁이 포기했다는 말은 아니었다. 유중혁은 독촉하는 대신 서서히 자신을 적셔왔다. 유중혁이 없는 삶을 네가 살 수 있겠냐고 항의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바보. 이미 너에게 헤어 나올 수 없을 만큼 푹 빠져서 나의 삶은 네가 없이 살기 힘든데. 끌어안은 무릎 사이로 머리를 묻었다. 아직, 여기서 무너지면 앞으로 더 괴로울 것이 분명했다. 괜찮아, 그래 괜찮아. 스스로를 다독이며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을 것 같아서.
시나리오가 끝났다. 서로 웃고 울며 그동안 겪었던 고생을 나누었다. 지친 몸을 벽에 기대 천천히 그 풍경을 지켜보았다. 저 멀리 손을 흔드는 아이들에게 웃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니까, 한 번이라도 더 눈에 새겨야했다. 그런 제 모습에서 불안을 느꼈는지 유중혁이 뒤에서 끌어안았다.
“김독자. 네가 원하던 결을 보고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 앞으로는 나와 함께 살자.”
“중혁아,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해?”
“또, 무슨 헛소릴.”
으르렁 거리는 목소리가 참 변함없어서 손을 뻗어 입을 맞추었다. 줄곧, 이렇게 입술을 맞추고 다른 사람들처럼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다정한 손길이 애가 탔는지 거칠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안돼.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가볍게 손으로 살짝 밀쳐내니, 유중혁의 얼굴에는 짜증이 자리 잡았다. 당신들이, 그리고 네가 많이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날개를 펴 공중으로 떠올랐다. 옷을 잡는 손길이 무거웠지만 이내 떨쳤다. 검을 빼 드는 모습마저 한결같아서, 그 모습에 이상함을 느꼈는지 시선이 집중되었다. 여기저기서 부르는 목소리에 미안하다고 속으로 몇 번을 더 사과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까부터 제 존재감을 뽐내는 메시지 창을 더는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사실은 정말로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여러분, 이제 돌아갈 시간입니다.”
“김독자!!!!!!!”
“눈치채고 있었잖아요, 다들. 행복해지세요.”
이변을 눈치챈 이들이 울부짖었다. 언젠가 봐온 풍경이 익숙했다. 모든 시나리오가 끝난 세계는 스타 스트림의 권한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부여받는다. 스타 스트림의 성좌인 김독자는 당연히 그들과 함께할 수 없었다.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었던 것들을 서로 외면해왔을 뿐.
이별은 만남이 있기에 찾아오는 것이고, 그걸 바라는 이는 없다. 멀리서 손을 내뻗는 이들을 향해 할 수 있는 것은 웃는 얼굴뿐. 아래서부터 서서히 흩날리는 몸에 작은 감사를 표하며, 그동안 몇 번씩 썼다 지웠던 문자를 전송하였다. 일행에게 보내는 편지와 개연성의 여파로 피를 토해가면서까지 다가오려는 사랑해 마지않는 바보에게 보내는 편지. 마지막으로 한번 더 꽃놀이를, 너와 같이 그 길을 걷고 싶었는데. 헤어짐을 알리는 각자의 핸드폰에서 울리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점멸하였다.
새하얗게 뒤덮인 설원에는 하얀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펴있었다. 그의 말처럼 새하얀 세상에서도 제 색을 잃지 않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오래되어 최소한의 기능만 유지하는 폰을 쥔 유중혁은 화면을 응시했다.
[중혁아, 흰동백꽃의 꽃말은 두 가지래. 비밀스러운 사랑과 손을 놓지 않는다는 의미의 굳은 약속. 너는 어느 쪽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이걸 질문이라고. 당연한 것을 매번 묻는군.”
답은 정해져 있지 않나. 전자는 네가 줄곧 숨겨왔던 마음. 후자는.
“충분히 즐겼나? 지켜보고 있다는 것 잘 안다.”
하늘이 대답하듯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은밀한 모략가. ‘이계의 언약’을 맺지.”
공기 중으로 퍼지는 소름끼치는 웃음소리와 함께 거대한 어둠이 세상을 집어 삼켰다.
[늘 바라던 것을 손에 넣으니 별로였나? 재미있군. 그가 원하지 않을 텐데.]
“답은 내가 낸다. 녀석이 멋대로 만든 결말은 필요 없어. 그래서 계약은?”
[알면서 묻나. 허하지. 대가는 이미 치뤘으니.]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녀석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혼자 겪는 어둠은 이제 지긋지긋했으니까